우리가 감격에 들떠있는 동안 한 가지 간과한 것이, 그 전날 밤부터 수영이가 태어날 때까지 어머니는 집에서 잠 한 숨도 못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 제대로 카톡 업데이트도 못드렸고, 어머니는 이미 속이 까맣게 타고 계셨다.
수영이가 태어난 후 어머니께 카톡을 드려 출산 소식을 알렸고, 광주의 엄마 아빠한테도 알렸다. 어머니는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 없으셨는지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원래 보호자 한 명밖에 들어올 수 없는 회복실이었지만 어찌어찌 들어오셨고 호빵이는 할머니와도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포대기에 쌓여진 호빵이는 눈에 소독액 같은 것을 넣고 있었다.
바로 이 조막만한 생명이 앞으로 당분간 우리 삶의 주인공이다.
입원실로 옮겨진 뒤로 우리는 3박4일이라는 꽤 오랜 기간 병원에 머물렀다. 자연분만이라면 바로 다음날, 아님 다다음날 퇴원이었겠지만 나나는 제왕절개를 했기 때문에 더욱 오래 머무를 수 있었고 그렇게 해야 했다. 이제는 하나의 상식이 되었지만 제왕절개는 자연분만보다 훨씬 더 많은 회복시간을 필요로 한다. 수술부위는 물론이거니와 몸 전체적인 회복까지 두배, 세배의 시간을 요구한다.
입원 기간은 수영이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 썩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어머니까지 포함해서 아이를 낳은 나나도, 옆에서 지켜본 나도, 심지어는 세상 밖으로 나온 수영이도 다들 기진맥진이었다.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했는데 병원에서는 우리를 가만 놔두질 않았다. 청력 검사, B형 간염 예방 접종 등등에 나나의 수술부위 처치가 계속 이루어졌다. 신기한 것은 간호사들이 나나에게 계속 아프지 않냐고, 진통제를 처방해주겠다고 얘기했던 것이다. 나나는 그때마다 괜찮다고, 진통제는 필요없다고 거절했다. 절개 부위가 가장 크다는 제왕절개를 해놓고 왜 안아프겠는가. 독한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나나가 안스러웠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군대, 감옥과 함께 병원을 포함시켰고, 푸코도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이 작동하는 기관으로 병원을 언급한 바 있다. 나는 3박4일의 병원 생활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병원의 역할'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미국'이라는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Birth certificate을 통해 수영이는 공식적으로 '미국 시민'이 되었고 두 달도 되지 않아 사회 보장 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아동의 인권이 지상 최고인 미국 시카고 한복판에서 우리는 수영이를 건강하게 양육할 의무를 띠고 있었다. 어떤 주기로 어떤 방식으로 수영이를 먹이는지, 기저귀를 갈아주는지, 우리는 이러한 시시콜콜한 사항을 입원실 칠판에 적도록 되어 있었고 간호사는 정기적으로 이 기록들을 차트에 입력했다. 이러한 기록의 습관은 퇴원해서도 그대로 실천되었다. 사실 어떠한 주기로 수유를 하는지 기저귀를 갈아 주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병원에서 나나의 가장 큰 이슈는 아무래도 모유수유였다. 갓 태어난 생명인 수영이는 이제 탯줄의 도움 없이 영양을 섭취해야 했다. 애초부터 모유수유가 목표였던 나나는 초반에 모든 산모들이 겪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모유수유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쉽지 않았고, 기술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1년간의 모유수유를 표준으로 여기는 미국 병원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에 봉착한 산모들을 위해 여러가지 지원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lactation consultant들이었다. 이 훈련받은 전문 간호사들은 상담을 통해 모유수유의 A부터 Z까지 모든 이슈들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많은 산모들이 모유수유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고 나나도 이들의 도움을 받아 모유수유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분만 직후부터 산모의 몸에서 모유가 충분히 생산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이 기간을 슬기롭게 보내는 것이 모유수유의 첫걸음. 많은 산모들이 분유수유로 돌아서는 것도 이 시기이다. 모유가 충분히 생산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턱대고 분유를 먹였다가는 아이가 분유에 익숙해져 모유를 먹이는 것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많은 미국의 병원들이, 신생아가 모유에 익숙해지도록 분유를 아예 먹이지 않는 '굶기기' 를 권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있었던 노스웨스턴은 그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어느 정도 분유로 아이의 영양을 보충하는 것을 허락했다. 어쨌든 모유수유를 목표로 하고 있는 나나는 수영이에게 분유를 주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배고파 보채는 수영이, 모유가 아직 준비가 안된 나나, 성공적인 모유수유라는 장기적인 목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이런 이슈 말고도 병원이란 곳이 애초에 유쾌한 공간은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나나와 아이의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의료진들이 입원실로 들이닥쳐서, 나나는 모자란 잠을 보충할 새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호자인 나라도 정신차리고 보초를 서며 도움을 주었어야 하는데, 피곤한 나머지 보조 의자에서 골아떨어질 때가 많았다. 가장 부끄러웠던 상황은, 3월 1일인가 아침에, 수영이의 주치의인 소아과 의사 Daphne Hirsh가 오전에 방문했을 때 내가 쿨쿨 자고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일어나보니 내 눈 앞에 모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러 모로 악몽같은 시츄에이션...
이 와중에 어머니는 아침 저녁으로 도시락을 나르시느라 고생하셨다. 하필 갑자기 추워져서 꽃피는 춘삼월인데도 눈이 내리는 날씨였다. 아마 어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병원에서 제공하는 '미국식' 식사로 연명하느라 고생 꽤나 했을 것이다. 수영이가 태어난 저녁 멋모르고 시킨 음식을 나나가 먹고 전부 게워낸 게 아직도 생생하다.
생명의 탄생이란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롭고 고상한 현상이다. 이렇게 태어난 수영이는 나나 침상 옆의 배시넷에서 너무나 귀여운 모습으로 생애의 첫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이런 고귀한 생명 탄생은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며칠간 우리는 의료와 관리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의료진은 수영이를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정해진 루틴 속에서 피로가 가중되기도 했다. 여기서 보호자인 내가 조금만 더 나나와 수영이를 잘 케어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그랬다면 병원 경험이 조금은 더 유쾌한 경험으로 남았을 텐데...














